언젠가 정명석 목사님이 최근 설교에서 “마르다와 마리아는 조직이 잘 갖춰졌다”라고 말씀했다. 그 설교는 대신 전해 들었는데, “역시, 탁월한 성경해석이며, 실질적이며, 방법론의 적용이다”라고 생각했다. 내게 ‘떡과 고기와 같은 영적 양식’이었다. 내게 월명동은 언제나 그리운 고향이다.
며칠전 나의 어머니가 전화를 하셨다. “명절에 오느냐?”라고. 그래서 내가 “전화로 우리 엄마가 이미 오셨으면서, 지금은 전화시대예요. 고향에 가봤자, TV보고 그냥 그래요”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네 말 들으니, 그 말이 맞다”라면서 한바탕 웃고 어머니는 고향으로 내려가셨다. 전화는 KTX보다 빠르다.
나는 고향 고흥을 생각하면, 가슴이 설레이고, 나의 첫사랑에게 연애편지를 보냈던 사춘기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월명동을 생각하면, 사춘기때보다 더 애절한 감성의 물결에 휩쌓인다. 내 삶이 그곳의 바위처럼 세워졌으니, 내가 그 모든 추억을 예루살렘 성전을 허물듯 무너뜨려야할까? 감정의 성전은 어떤 모양도 모두 주님의 은혜요, 선물이다. 그것을 부인하면, 분노의 가인이 되고, 속임의 야곱이 된다. 나는 나를 속이지 않으리라!!
나는 고향에 가지 않듯, 월명동에도 가지 않는다. 고향을 떠난 가인처럼, 아브라함처럼, 야곱처럼, 요셉처럼 나는 떠남으로 새로운 고향에 정착한다. 제1의 고향은 고흥이요, 제2의 고향은 월명동이요, 제3의 고향은 지금의 교회가 되길 원한다. 지금의 교회에는 예수의 말씀이 있기에.
기독교복음선교회에서 인연을 맺은 많은 사람들이 내게 “다시 돌아오라”고 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내게 ‘구원의 말씀’을 보내주지 않는다. 보내준 몇몇을 제외하면, 대부분 내게 말씀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들의 한계가 거기까지다. 개와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지 말라고 해서 그런 것인가? 결국 나는 “그들은 설교를 형식으로 들어서 그렇구나”라고 결론지었다. 생명으로 들었으면 내게 생명의 말씀을 전해줬으리라.
고맙게도 내게 말씀을 보내주는 몇몇을 위해 나는 하나님께 진실한 축복을 간구했다. 원수를 축복하고, 원수의 문제를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내게 말씀을 준 몇몇에게 거대한 축복을 주문했다. 나의 기도가 민원이 되어 하나님께 전달되었다면, 그 기도가 선물이 되리라!!
조직은 씨줄과 날줄이다. 정명석 목사님이 ‘마리아와 마르다’를 ‘밥하는 자와 말씀듣는 자’로 비유하면서, ‘육신의 양식과 영혼의 양식’을 모두 갖출 것을 설명했다. 이보다 완벽한 지혜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조직이다. 조직(組織)은 ‘옷’을 말한다. 제도(制度)도 옷의 법도이다. 조직도 제도도 모두 ‘아름다운 옷’이다. 조직을 갖춘다는 것은 옷을 입고 나간다는 뜻이다. 옷이 없으면, 알몸이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고, 그 가죽옷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아멘!! 말씀이 우리에게 영원한 옷이 되었으니, 그 옷이 바로 의(義)의 옷이다. 한자로는 의의(義衣)라고 한다.
조직과 제도는 보이는 옷이요, 예수님의 이신칭의(以信稱義)는 영적인 옷이다. 외적인 옷과 내적인 옷이 다르다. 조직은 보이는 율법의 옷이요, 복음과 십자가는 내적인 영혼의 옷이다. 이것을 반드시 알아야한다. 월명동은 보이는 성전이요, 사람은 내면의 성전이다. 내면의 성전은 각 사람의 마음속에 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다. 성전(聖殿)은 거룩한 궁전이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진리와 성령으로 예배하라”고 하셨다. 장소는 형식에 불과하다. 진리의 말씀과 함께 성령으로 예배를 드리면, 그 장소가 어디든 성전이 된다. 상황이 그러해서 감옥에서 예배를 드리면, 감옥이 성전이요, 절에서 예배를 드리면, 그 순간에는 그곳이 성전이다. 마음속에 누구를 모시느냐가 중요하다.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는 70년동안 그들은 고향땅 예루살렘을 동경했으나, 70년 동안은 바벨론이 그들의 성전인 것이다. 그것을 모르면, 성전없이 살 뿐이다.
조직과 제도는 다른 말로 ‘사명’과 ‘이름’이다. 또한 ‘양의 옷’이다. 내가 여러번 마태복음 5장과 6장과 7장에 대한 칼럼을 쓰면서 설명했지만, 사명의 옷을 입고,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 마태복음 7장 끝에서 ‘거짓 선지자’를 묘사하길 ‘양의 옷을 입고 노략질하는 이리’라고 했다. 쉽게 말해서 아름다운 양복을 입고 깡패행실을 한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단체를 만들어서 뒤로는 마약을 파는 ‘양두구육’을 행한다면, 그것이 거짓 선지자다. 정명석 목사님께 이름을 받고, 이름값을 못하면서 거짓말과 권력과 약탈을 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거짓 제자요, 거짓 신부다. 이름보다 중요한 것이 행위의 열매다. 그래서 예수님은 “행위의 열매가 나무를 결정한다”라고 말씀한 것이다. 내가 크리스챤이라고 하면서, 여기저기 사기를 치고 다니면 나는 사기꾼 크리스챤이 된다. 그와 같이 기독교복음선교회 소속 섭리인들이 거짓말과 악한 행실과 불법을 행한다면, 그 행위로 말미암아 ‘거짓 섭리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망각하면 망한다.
마태복음 3장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고 했다. 그리고, 그 음성을 몰래 엿들은 마귀는 마태복음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단서조항을 달면서, 3가지 유혹을 했다. 그때 예수님은 어찌 하셨는가? 마귀의 행실을 거부하면서, “말씀으로 살아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라”고 하셨고, 그렇게 행하셨다. 만약,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귀의 행실을 했다면, 어찌 되겠는가? 주님을 믿으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호적에 공식적으로 입적된 양아들로서 ‘마귀의 행실’을 했다. 마귀의 행실을 함으로, 제자들은 어찌 되었는가? 야곱의 4째 아들 유다가 회심하듯이 참회로서 다시 효자의 길을 걸었다.
예수님은 12제자를 이스라엘 12지파를 상징해서 택했다. 이것이 조직이다. 야곱 이스라엘은 12아들이 있었다. 요셉이 ‘죽었다가 살아남’으로 호적에서 지워졌다. 그래서 야곱은 요셉 대신에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양아들로 삼았다. 예수님의 조직은 예수님과 가룟유다가 죽었다. 그래서, 가룟유다 대신에 맛디아가 세워졌고, 예수님을 대신해서 사도 바울이 부름을 받았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바톤을 이어받은 제자 공동체의 맏아들 격이다. 야곱의 아들들이 호적상으로 13명이듯, 예수님도 13명의 사도를 세웠다. 얼마나 오묘한 예수님의 조직인가?
예수님은 잘 짜여진 조직의 제자 공동체를 통해서 그 시대 종교의 평화운동을 내적으로 펼치셨다. 마태복음 5장과 6장과 7장을 보면 어떠한 신앙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나온다. 옷보다 행위다. 이것을 잊으면 죽는다. 양복을 입고 지혜를 말하면서 남의 재산을 탈취하면, 그가 ‘사기꾼’이다. 이리의 옷을 입은 이리는 누구나 쉽게 분별한다. 양의 옷을 입은 이리를 조심해야한다. 조직보다 선한 행실이다. 마태복음 23:23을 기억할지라.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정명석 목사님은 “하나님은 높은데 좌정하신다. 대전시를 중심해서 12개의 군이 있는데 제일 높은 곳이 금산이고, 그 중에서 진산면이 제일 높고, 진산 마을 중에서 석막리가 제일 높고, 석막리에서 월명동이 제일 높다. 월명동은 대한민국에서 제일 높은 곳이다. 하나님의 전은 높은 곳에 위치한다”라고 설교했다.
하나님의 성전이 어디에 위치하는가? ‘성전의 높이’를 통해서 월명동의 거룩함을 입증하는 말씀이다. 이러한 설교를 듣는 자들은 정명석 목사님의 지혜로움을 인정할 것은 해야한다. 그런데, 정명석 목사님의 설교가운데 1%가 빠졌다. 그는 “월명동이 높은데, 그곳에서 내가 제일 높다”라는 말씀을 하시고 싶을 것이다. 그 말을 한즉, ‘낮은 자’가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은 가장 높은 하늘성전에 계시다가, 베들레헴 말밥통에서 태어나시면서, 이집트로, 나사렛으로, 가버나움으로, 거처를 옮기시다가 사형수로 죽임을 당하셨다. 가장 낮은 자로 구원받지 못한 구원주가 예수 그리스도이다.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자로 사시는 분이 바로 ‘구원주의 사명’이다. 그것을 잊으면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듯 떠나신다.
이 땅의 성전이 높다고 한들 모두 하늘아래 ‘뫼’에 불과하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세상권력과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들의 백합화를 비유로 드셨다. 백합화가 입은 꽃잎의 옷이 솔로몬이 입은 왕복보다 훨씬 아름답다고 하셨다. 과연, 그러하시다. 하늘궁전이 최고의 걸작품이다. 하늘궁전은 곧 사람속에 세워지는 생명성전을 뜻한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시려고 율법에 깊이를 더하셨다. 내가 이 칼럼을 쓰는 주된 목적은 기독교복음선교회 소속 섭리인들이 자신들이 듣는 설교를 더 깊게, 신령하게 이해하길 바라는 사랑에서다.